린브랜딩(Lean Branding)은 실무입니다
- Michelle Lee

- Nov 24
- 5 min read
Updated: Nov 25
스타트업에서 일하다보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게 되는 말이 있는데, “린(Lean)하게 일한다”, 즉 최소한의 자원으로 효율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이 관점은 제품 개발이나 운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투자 관점인 브랜딩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물론 브랜딩은 퍼포먼스 마케팅이나 UX 업데이트 같이 단기 지표에 따라 탄력적으로 방법을 바꿀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고객 중심이라는 가치는 변치 않지만, 그것을 기업의 역사와 철학에 비추어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할지를 기업 스스로 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숫자보다 개념과 철학이 더 큰 힘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회사 안에서 철학이라는 가치 하나만 붙잡고 일하다 보면, 장기적 투자의 방향성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호해지고, 실무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다수에게 명확히 보이지 않는 답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계속 밀어붙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속한 전문성이 아무리 깊은 탐구와 정교한 시스템 위에 서야 하는 영역이라 해도, 결국 스타트업의 본질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제 막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가는 스타트업에서 브랜드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판단을 요구받는 일이다. 이 때문에 브랜드 디자이너는 때로는 ‘린하게’ 생각하고, 준비된 범위 안에서 과감하게 실행해야 한다.
우리 회사는 리브랜딩(Rebranding)이 필요한가요?
마이클의 첫 브랜드 디자이너로 입사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었다. 내부적으로는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놓은 제한적인 디자인 에셋이 앱 내외부에 오랜 시간 반복 사용되며 피로감이 누적된 상태였고, 그래서 브랜드 디자이너의 합류가 새로운 룩이 탄생하는 리브랜딩의 신호로 해석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마이클이 가장 뚜렷하게 가지고 있던 목표는, 마이클 정비소 오프라인 경험을 더 기억에 남는 좋은 경험으로 완성시키는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브랜딩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변화가 아니라 강화였다. 이런 관점을 입사 1개월차에 회고로서 전사에 발행했다.
브랜드가 지금의 사업 방향성에 확신을 가지고 가속하는 시점에 리브랜딩을 진행하기엔 위험성이 있다. 브랜드를 다시 정의하는 데는 시간과 리소스가 필요하고, 그 기간 동안은 새로운 실험에 쓸 수 있는 에너지와 집중력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마이클 서비스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 기존 로고의 직관성이 충분했고, 다른 서비스 대비 색상 차별화 역시 명확했다. 단지 비주얼 미감과 완성도를 조금 더 높인다는 이유로 전체 리브랜딩을 진행하기엔 비용 대비 효용이 크지 않았다. 결국 필요한 건 지금 가진 방향을 더 잘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입사 3개월차, 비교적 컴팩트한 브랜드 가이드라인 1.0을 발표하며 우선 방향성을 정의하고 문서화했다. 온·오프라인 환경에 최적화된 최소한의 로고 리뉴얼과 색상 체계를 정리하고, 마이클이 가진 감성적 가치에 구체적인 언어를 부여했다.


실무적인 린브랜딩(Lean Branding) 하기
1. 방향성에 먼저 합의를 맞춘다
디테일은 수많은 논의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우리가 어떤 브랜드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방향성이 명확해야 한다. 이 합의가 이후 모든 논의의 기준이 된다. 특히 회사의 역사와 미래 청사진을 모두 그리고 있는 경영진과 나의 인식을 먼저 일치시키고, 그 내용을 문서화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2. 우리만의 Fundamentals(핵심 요소)를 정의한다
완벽하고 자세한 브랜드 매뉴얼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가이드를 만들 리소스가 충분하지 않거나, 거대한 원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단계도 있다. 그럴 땐 지금 가장 필수적인 것, 즉 fundamentals부터 빠르게 정의해야 한다.
처음부터 모든 영역을 깊게 다룰 필요는 없다. 제품의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대부분 IT 서비스의 초기 단계라면 로고 사용 원칙과 폰트, 색상 팔레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일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시점에 우리 회사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채널과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준만 선별해 정의하는 것이다.
3. 내부가 이해할 수 있는 스케일에서 시작한다
브랜드 가이드라인의 목적은 내부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종종 디자인 시스템과 브랜드 가이드라인을 혼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디자인 시스템은 프로덕트 전반의 UX 구현을 위해 디자이너와 개발자 간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하는 도구이고, 브랜드 가이드라인은 더 넓은 내부 구성원과 외부 파트너까지 고려한 공용 기준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모든 내용을 깊고 방대하게 담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너무 많이 담으면 각 부서에서 적용하기 어렵고, 현장에서는 쓰이지 않게 된다. 작지만 명확한 기준이 초반에는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4. 빠른 문서화가 실행력을 높인다
암묵적으로만 공유된 기준을 바쁘다는 이유로 방치하면, 결국 각자가 이해하는 브랜드가 모두 달라지게 된다. 실제로 마이클 브랜드 디자인팀은 디자인팀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로 논의된 워크숍 내용을, 전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정리해 공유한다. 간결해도 좋으니 문서화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기준이 정리되어 있으면 요청과 실행 사이의 간극이 줄어들고, 브랜드의 일관성도 자연스럽게 유지된다.
5. 큰 변화를 향해, 작게 쪼갠 시도를 더 자주.
큰 변화는 때때로 대대적인 선언과 긴 준비 끝에 이루어지는 큰 발표가 필요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은, 그 변화를 더 작게 쪼개서 시작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의 마이클은 ‘쉽고 편하다’는 마이클의 핵심 가치를 바탕으로, 차량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운전자까지 넓게 포용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이 목표를 더 가볍고 진정성 있게 실현할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차를 열어봐야 알 수 있는 전문 정보 대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가장 기본적인 차량 정보는 무엇일까를 생각했고, 그때 떠올린 것이 바로 차량 경고등이었다.
경고등 정보를 누구나 손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차량 본네트 서랍에도 쏙 들어가는 미니 카드로 제작해 정비소 굿즈로 배포했다. 실제로 사용성이 높아 꾸준한 소요와 긍정적 반응이 이어지는 현장형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작은 시도였지만, 마이클이 추구하는 변화를 가장 작고도 생명력 있게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6. 공유는 자주, 부담 없이
이 부분은 나에게도 여전히 어렵다. 브랜딩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오히려 자유로운 논의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더 다듬고 확신을 갖고 공유하려다 보면 공유 주기가 자연스럽게 길어진다.
하지만 브랜드 디자이너가 공유해야 하는 것은 완성본 발표가 아니라, 진행 중인 과정이라는 것을 점점 더 느낀다. 작업 중인 내용을 자주 공유하고 의견을 듣다 보면 더 현실적인 방향으로 빠르게 다듬을 수 있다. 시장의 반응과 실제 상황을 반영하며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린브랜딩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브랜드도 말랑말랑한 시대
디자인은 명확히 눈에 보이는 영역인 만큼 다양한 의견과 피드백을 감수해야 한다. 실제로 내가 브랜드 가이드라인을 1.0, 1.1, 1.2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브랜딩은 한 번 정하면 잘 바꾸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실무에서는 완벽함보다 실제 아웃풋을 내는 행동이 훨씬 중요했다. 핵심 가치와 철학이 바뀌지 않는 한 작은 변화는 브랜드 이미지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시장과 더 자주 만날 수 있고, 학습의 기회를 더 많이 만들었다.
그래서 마이클 BX팀은 Fundamental(핵심) 영역과 Playground(놀이터)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채널과 타겟의 성격에 맞게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말랑말랑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굳이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TPO나 사회성의 영역이다. 이전보다 관계형 소비, 의미 중심 소비가 주를 이루면서 브랜드도 ‘뚝심’만큼 말랑말랑한 ‘사회성’이 중요해진 시대가 온 것이다. 점점 더 작은 브랜드, 격이 없는 브랜드가 사랑 받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성장하는 브랜드는 불완전할 용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린(lean)하게 일한다’는 말이, 어떻게 들으면 관성처럼 말하는 판교 사투리로 느껴질 때도 있고, 그냥 대충 빠르게 쳐내라는 소리처럼 들려 반감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말이 스타트업의 본질과 현실을 가장 잘 담고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려 하면 결과물은 느려지고, 그 속도에 익숙해진 조직은 적은 생산성에도 둔감해진다. 브랜드 관점에서 보면 고객과 소통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생명력을 잃는 것이다. 반대로 실행 속에서는 학습이 쌓이고, 쌓인 학습과 기준이 결국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는다. 실무는 결국 ‘만들면서 고객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시스템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지금 일하는 브랜드에도 언젠가 긴 호흡의 준비가 필요한, 대대적인 리브랜딩이 필요할 순간이 올 수 있다. 빠르게 움직이고 변화하는 스타트업 환경에서는 그 시점이 3년 후일 수도 있고 바로 내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매일 쌓아온 작은 성공과 액션들이다. 이 축적이 사업 차원의 명확한 목표와 만났을 때, 더 설득력 있고 고객에 맞닿아 있는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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